밥은 먹고 다녀야지만 - 쿠바 이야기 3


(너무 뒷북이지만, 그나마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시작. 흠흠.)



"쿠바 음식은 별로"라는 얘기는, 쿠바행을 앞두고 이것저것 자료를 찾으면서 가장 많이 접한 충고 중의 하나였다. 쿠바에 다녀 왔다는 사람들도, 인터넷 게시판도, 론리 플래닛도 그렇게 말했다. 쿠바 땅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긴 했지만 어딜 가든 그 나라 음식 구경은 여행의 큰 낙인지라 살짝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아바나에 도착한 첫 날 말레콘을 어슬렁거린 후 들어갔던 작은 식당의 저녁은, 그래서 기대 이상이었다. 좀 직설적이고 모양새없기는 했지만 샐러드와 메인 디쉬는 모두 먹을 만했다. 샐러드, 라고 부르는 게 민망한 조각 야채가 떡하니 접시에 올려 나온 것에 당황하긴 했어도 토마토와 아보카드는 싱싱했고, 오일과 소금 후추로 살짝 익힌 껍질콩(과 비슷한 어떤 것)도 간이 잘 맞았다. 구운 돼지고기는 부드러웠고 새우 엔칠라다는 입맛을 돋궜다. 게다가 맥주도 맛있잖아. 식사가 끝나갈 때쯤 "서비스"라며 할아버지 웨이터가 테이블에 올려 준 글라디올러스 한 송이와 시가 한 개피까지, 우리는 제법 만족했다.


(이것이 문제의 샐러드)


첫날을 포함하여 쿠바에 머무른 날 중 거의 절반은 모히토를 마셨다. 럼과 민트잎, 라임, 설탕, 얼음을 섞어 만든 이 칵테일은 쿠바 어디를 가든 메뉴에 올라 있다(서울의 어지간한 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라와 럼을 섞은 쿠바 리브레(자유쿠바 만세, 라는 이름의 이 음료에 가장 미국적인 음료인 콜라가 들어가 있는 건 괴상한 역설이다), 화이트 럼과 라임즙을 섞은 다이키리 등등 맛있는 칵테일이 여기저기 많았다. 알콜도수가 다른 두세 가지의 쿠바 맥주도 도수별로 모두 감칠맛이 났다. 0.5달러 안팎의 길거리 피자는 여기 곁들이면 딱이었다. 관광객용 레스토랑에서 바가지를 쓴 적도 있지만 한국 음식값에 비하면 그닥 높은 가격도 아니었으므로 푸근히 먹고 마실 수 있었다.

흐뭇한 마음이 가시고 슬슬 질리기 시작한 건 고작 사나흘이 지난 후였다. 세계 어딜가나 많은 이탈리아와 중국 식당은 아바나에도 많았다. 오랜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스페인 식당도 못지 않게 많았다. 처음엔 그런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쿠바에 왔으니 쿠바 음식이지... 그러나 몇 군데를 돌아보아도 "쿠바 음식"이라는 건 음, 알 수가 없었다. 쿠바의 식당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중심가의 뻑적지근한 레스토랑은 모두 국가에서 운영하는 식당이고(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이럴 때 문득 깨닫는다), 테이블 서너개짜리 작은 식당(파라도르 Paladore라고 부르고, 골목골목 아무 데나 있다)은 개인이 제 집에 차리는 사설 식당. 후자에서 쿠바의 가정식 요리를 맛볼 수 있다...고 하지만 가정마다 요리가 똑같을 줄은 몰랐다. 일단 고기는 돼지나 닭. 소는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개인 식당은 아예 취급 금지고 호텔이 아닌 이상 어딜 가도 소고기 요리는 적다. 그게 아니면 생선인데 무슨 종류인지는 잘 안 알려 준다. 그냥 생선 필레, 생선 구이, 이런 식으로만 써있다(큰 식당도 태도는 대략 비슷하다). 이것들을 기름에 굽거나 튀기거나. 해산물은 굽거나 엔칠라다 소스를 입히거나. 자, 이게 메인이고 여기에 몇 가지가 곁들여진다. 샐러드는 예의 생야채. 내키면 오일과 식초를 치거나 말거나. 일종의 가니쉬로는 삶은 감자...바나나 튀김...검은 콩밥...그리고 검은 콩죽...이 삶은 콩의 맛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다... 쿠바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 대부분은 이것들 중 두세 가지가 번갈아 조합된 접시였다. 재료는 신선하고 질좋았지만, 통째로 익혀 낸 것 외에는 도대체 '요리'라고 할 게 없는 지극 단순한 덩어리들. 여행이 중반을 넘기면서 나는 "섬세한 음식이 먹고 싶다"고 부르짖었지만, 음, 그런 건 없었다.





이 쿠바 음식의 절정은, 두번째 방문지였던 트리니다드에서였다. 여기서는 민박을 했는데, 민박집 아줌마가 차려주는 밥상이라는 것도 역시 고기구이...바나나 튀김...콩밥...콩죽...양은 두 배...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나는 이후 "쿠바 음식"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피자나 파스타나 빠에야, 그러니까 쿠바 음식 아닌 것을 원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 아바나의 차이나타운에서 먹었던 완탕 스프는, 강렬한 MSG의 맛과 더불어 눈물날 만큼 반가웠다.

아바나로 오는 길에 하룻밤 묵었던 멕시코시티에서는 살사 종류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 호화로운 멕시코식 아침을 맛볼 수 있었는데, 국경 하나의 차이는 컸다.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넘어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방콕의 그 흥겨운 먹을거리들과 달리 캄보디아 음식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던 시엠립. 태국식/베트남식/중국식/서양식은 모두 갖춰져 있었지만 캄보디아식 음식은 수도 적었고, 그 생선 수프는 정말- 어길 가든 비위 하나는 튼튼한 나로서도 견디기 힘든 비린내였다. 섣부른 비교일 지 모르지만, 독재 정권이 군림하는 나라에서 느긋한 음식 문화같은 건 계승되기 힘든 것일까. 그러고 보니 우즈베키스탄도 그랬다. 군부가 통치하는 그 나라, 약간의 향신료를 쳐서 불에 구운 고기꼬치와 밀가루와 소금만 넣은 듯한 납작빵 정도가 대표적인 음식이라 했다. 사막이 반인 그 동네는 그렇다 쳐도 쿠바는 열대 기후의 카리브해 섬나라. 식재료가 얼마든지 풍성할 수 있는 지리 조건이지만 그걸 '요리'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프랑스애들처럼 유난떨 건 없어도 조리법 쯤은 고민할 수도 있잖아. 쿠바에서 다양한 것은 달콤한 칵테일뿐이었다. 어딜가도 그것만은 원없이 마셨다.


by 하품 | 2007/03/29 22:52 | 떠나다.찍다 | 트랙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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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이오공감의 흔적 at 2007/03/31 12:00

제목 : 2007년 3월 31일 이오공감
본격적인 UMPC. 그 2세대 제품들~  by 냥이1세대 UMPC들은 크기와 성능, 그리고 배터리 지속 시간까지, 휴대용 기기의 모든 점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제품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워낙에 기대감이...speedo  by 신기루수영복 수명이 1~2주 정도 밖에 안남아서 구입하러 갔습니다. 오늘부터 20% 세일 한다기에 신나게 달려갔죠. 제가 사려던 제품은 수입이라 20%가 안된다고 하더군요.전에는...처음해본해부. Samsung SPH-g100......more

Commented by belle at 2007/03/31 12:41
오홋. 하품~이오공감이다. 잘 지내고 있는겨?
Commented by Beatriz at 2007/03/31 22:38
우와아. 쿠바에 다녀오셨군요. 정말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인데... 음식이 별로라니 아쉽습니다. 그래도 맛난 술은 원없이 마실 수 있다니 괜찮아요괜찮아요~ (-_-;;;)
그런데 왜 무슨 생선인지는 안 가르쳐 주는 걸까요?
Commented by hades708 at 2007/04/01 08:02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블로그 정보 공유및 홍보 사이트를 오픈했습니다

님의 블로그를 등록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

사이트 주소는 http://bloging.ba.ro 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아직 부족한점이 많네요..^^

오셔서 많은 가르침, 아디디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블로그를 운영중이신 분이라면 누구라도 등록이 가능합니다^^

언제나 좋은 하루되세요..^^
Commented by 建武 at 2007/04/01 12:47
허걱. 이오공감떴네? 방문객이 쓸데없이 많아졌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비호감 블로그답게 덧글 수는 적군. 근데 위에 저 사람은 누굴까나.. -_-;
Commented by 하품 at 2007/04/02 19:34
어라. 주말에 접속 못했더니 그 사이 이오공감이 됐었군. 비공개에서 공개로 돌려 놓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군... (다시 비공개로 바꿀까..) 근데 뭐, 여전히 조용하니까 별 상관은 없을 듯.
Commented by girin at 2007/04/02 21:49
짐작컨대 뭔가 신변의 변화가 있어 보이는군. 잘 지내는가!!
달력전달식을 하지 못한 채 -_- 4월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네.
시간이 남는다면 평일 어느 저녁 식사 한 끼 어떠신가?
Commented by 하품 at 2007/04/05 12:49
흐흐. 달력은 포기(어차피 이제 요일감각도 없네). 이젠 평일이 더 한가하니깐 저녁 콜! 바쁜 당신이 시간 통보하면 기꺼이. 그런데 다음 주에 또 놀러가니까(-_-;) 그 후에 보려면 두세 주는 또 있어야겠는걸?
Commented at 2007/04/09 00: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박혜연 at 2009/05/13 17:58
쿠바 특히 수도 아바나에는 이탈리아음식점이랑 중국음식점등은 많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쿠바전통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거의없을뿐이지... 나름대로 식도락가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보통이라고 보아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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